물론 포르노라고 왜 시나리오가 없을까. 시나리오 없는 포르노란 사실 재미가 있다. 누드와 포르노의 차이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냥 벗겨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 혹은 모델과 그것을 감상하는 누군가와의 관계라는 것이 포르노와 누드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포르노에 시나리오가 필요없다는 말은 바로 시나리오의 역할에 대한 것일 것이다. 즉 한 마디로 포르노에 섹스신 없는 포르노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남자와 여자, 혹은 여자와 여자, 아니면 남자와 남자 사이의 섹스가 없는 포르노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포르노에서의 시나리오란 그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어떻게 배우들을 벗기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섹스를 하는가. 나아가 배우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근친상간도 있을 수 있고, 사제관계도 있을 수 있고, 성직자이거나, 군인이거나, 경찰이거나,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관계이거나... 어떻게 하면 소비자로 하여금 흥미와 욕망을 자극할 수 있을까.

 

즉 포르노에서 시나리오란 바로 그 섹스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 섹스신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전달하기 위해 포르노에서 시나리오란 쓰인다. 독자적인 네러티브로서가 아니라 그에 종속된 수단으로서. 그래서 포르노에서 시나리오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헐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를 만들려 한다.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최첨단 특수효과기법을 사용해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영상을 보여주겠다고. 최고의 배우와 최고의 스텝과, 때로 시나리오는 그를 위한 수단이 된다. 얼마나 배우의 매력을 드러내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특수효과들을 보여주고,

 

그래서 때로 영화를 보다 보면 인지도 있는 유명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배우를 위해 시나리오가 봉사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원래는 그런 시나리오가 아니었을 텐데, 워낙 출연한 배우가 배우이다 보니 그로 인해 약간 이야기가 뒤틀리는 경우.

 

대충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의 네러티브를 위해 장면이 존재하는가. 장면을 위해 시나리오의 네러티브가 존재하는가. 시나리오의 구현을 위해 배우를 섭외하는가. 배우를 위해 시나리오를 고쳐쓰는가. 물론 그것은 작품을 만드는 목적에 비례할 것이다. 네러티브의 탄탄함을 우선으로 삼는 영화라면 나머지는 그를 위한 수단일 테고, 일류배우와 멋진 장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라면 시나리오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이다. 실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 얼핏 휘황해 보이지만 그 네러티브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의 반복.

 

하긴 시나리오를 쓴다고 할 때도 목적은 가지일 것이다. 어떤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가.

 

공포영화에서라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할 수 있는 어떤 미스테리나 괴물, 사건등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멜로영화라면 배우들이 서로 사랑하는 장면을 어떻게 예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고려할 것이다. 추리물이라면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장과 그것을 결정적으로 잡아내는 장면을 먼저 만들고 나머지를 채워나갈 것이다. 아예 배우를 전제로 시나리오도 쓸 있겠지. 차이라면 이 경우는 시나리오 작가 - 혹은 감독의 의도가 우선해 반영되었다면 전자의 경우는 외적인 의지들이 시나리오 - 혹은 감독의 의지를 침범한달까.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소설을 쓴다. 왜 쓰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장면은 무언가.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어고. 주제다.

 

무협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 바로 싸움이다. 어떻게 어디서 어떤 적과 어떤 수단을 가지고 싸우는가. 이유는 무엇이고, 적의 정체는 무어고, 쓰이는 무공은 어떤 것이고. 그를 위해 주인공을 설정하고, 적과의 관계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주위 배경을 만든다.

 

드라마 늘려쓰기가 문제가 되는 것도 그래서다. 원래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늘려 버린다. 그 순간 그 동안 주제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유지되던 구조가 흔들리며 시청자들 자신도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게 뭔가.

 

최근 무협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끼는 게 그런 점들이다. 시작은 참 화려하고 좋다. 참신한 설정에 대담한 네러티브에, 그런데 이게 읽으면 읽을수록 뻔해져간다. 도대체 시작부분에 그렇게 시작했는가 잊을 정도로 시작은 창대하되 끝은 평범하다. 왜?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스스로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확신이 서지 않으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 그리고 일단 시작하고 났더니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기존이 다른 소설들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뻔하게 다를 것 없는 캐릭터와 관계와 사건들로. 나중 가면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소설을 읽고 있었는가를 잊게 된다. 죄다 똑같아 보여서.

 

원래 음악을 쓸 때도 먼저 사비 - 혹은 하이라이트부터 쓴다고 한다. 절정부분을 쓰고 거기에 나머지를 붙이는 것이다. 들려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부분, 그리고 그를 위해 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트로며, 버스며, 브릿지며, 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주제다.

 

결국은 주제다. 과연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가. 포르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섹스를 어떻게 보여주려 하는가. 시나리오가 필요없다고 하면서도 포르노 역시 그같은 훌륭한 시나리오가 받쳐줄 때 더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저 말은 아마 존 카멕이 FPS에서의 시나리오의 역할에 대해 한 말이었을 테지만, FPS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싸워야 하는가. 눈앞의 적들에 대해 나는 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야 하는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미로를 헤매며 순간순간 깜짝 놀래감며 나의 시간을 투자해야 이유는?

 

더 멋진 장면도 중요하지만, 그 멋진 장면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나리오도 필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시나리오란 그 멋진 장면을 위해 봉사하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게임시나리오의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은 게임으로 구현할 수 있는 한계에 종속된다는 것.

 

주제없이 재미있기만 한 소설이란 재미가 없다. 주제 없이 아름답기만 한 영화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관객이 극장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들어가는 것은 짧은 몇 분의 시간을 위해서다. 그 시간을 얼마나 훌륭하게 꾸며 보여주는가. 연출의 역할일 테고 시나리오의 역할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시나리오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네러티브인가. 당연한 상식일 테지만 때로 너무 당연하게 무시당하기도 해서. 좋은 이야기꾼이란 바로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할 있는 이일 것이다. 역시 당연한 이야기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그렇다.